강운구 사진전 – 경주남산

강운구

2017.12.06-2017.1.08

~2017.12.06-2017.1.08~

경주남산, 강운구가 찍었으되 강운구의 것만이 아닌

경주남산. 높이 갓 500미터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신라의 성역이던 천 년 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품어 온 역사적 의의와 산적한 유물들을 생각하면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키 어려운 산이다.

‘경주남산’이 경주를 넘어 우리 모두의 귀한 자산이듯이, 사진가 강운구가 찍은 <경주남산> 역시 마찬가지다.

1987년부터 골 깊고 능선 가파른 남산 곳곳을 발로 길을 내며 찾아다니기 수년. 아침 해에 얼굴을 드러내는 동남산의 불상들을 찍기 위해서는 밤을 낮 삼고, 저녁 해에 환해지는 서남산의 불상들을 찍기 위해서는 산에서 밤들기를 기다렸다. 일 년에 한번 동짓날 해 뜨는 순간에만 한없이 후덕한 표정을 드러내는 감실불상은 또 어떠했을지, 사진 속 꽃 피고 눈 쌓인 자연과의 조화까지 살피면, 이 사진가의 행보를 가늠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누가 다시 경주남산을 이와 같이 찍을 수 있으랴”가, 강운구의 경주남산에 대한 일관된 평이다. 강운구가 찍기까지는 이전에도 없던 사진이지만, 신라 이래 천년 세월보다 최근 십 수 년 새에 더 큰 변화를 맞고 있는 경주남산이고 보면 이후에도 다시 없을 사진이다.

저 멀리 농담을 달리하며 아스라이 멀어지는 능선들을 뒤로 한 채 나무인양 바위인양 삼층석탑을 세운 용장골능선. 헌화인 듯 발치에 분홍 진달래를 피운 삼릉골 관음보살입상, 바위에 상반신만 드러난 탑골의 승상은 미처 땅속에서 거두어 올리지 못한 장삼자락을 흙 위에 긴 빛 자락으로 드리우고 있다. ‘경주남산 석불과 석탑들의 공통적 특징이 자연과의 조화에서 오는 부드럽고 따듯한 친밀감’이라 했으니,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이 그러한 경주남산의 특징들을 그득히도 담아내고 있다.

기록의 차원을 넘어선 불상들 저마다의 인상은 어떠한가. 강운구의 경주남산에 대해 “대상의 내부에 들어가면 따뜻하고 친밀한 것과 만날 수 있다는 강운구 씨의 미학은 부처의 얼굴 묘사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저마다 얼굴이 다른 부처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부처 얼굴이라기보다 숱한 역경 속에서 끈기 있게 버티어 온 할머니의 얼굴’ ‘어수룩하고, 아픈 듯, 찡그리는 듯, 웃는 듯 하여 거의 표정이 없는 표준 한국인, 아니 나이 든 한국인의 얼굴’. 이것이 사진가 강운구가 경주 남산의 부처들에서 찾아낸 얼굴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겨진 강운구의 경주남산 사진들은 강운구가 찍었으되 강운구의 것만도 아닌, 우리의 경주남산이다.

경주남산은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신관 개관 기획전으로 열린 강운구 사진전 <오래된 풍경>에 그 일부가 선보여졌을 뿐, 단일 전시로 오롯이 묶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디지털 이전 필름으로 촬영된 이 사진들은, 전시에서 처음 흑백으로 선보여진다. 색의 수런함이 사라짐으로써 더 깊어지는 고요를 중시한 것이다.

전시와 함께 <경주남산>(열화당, 흑백, 2016)도 출간되어 선보인다. 경주 향토사 연구가 윤경렬이 “나라가 선 후 반세기 가깝게 흘러도 아무도 돌보지 않던 남산의 신비를 격 높게 뜻 깊게 세상에 소개해 준 책”이라 찬사 한 <경주남산>(열화당 1987)을 보다 널리 나누어 보기 위한 보급판 형태이다.

전시는 2016년 12월 6일부터 2017년 1월 8일까지 열린다. 통의동 한옥에서 7년 여 간 서촌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해온 사진위주 류가헌이 새롭게 청운동 시대를 여는 이전 개관전시이기도 하다.

전시문의 02)720-2010

 

작가 소개

사진가 강운구

사진가 강운구는 <마을 삼부작>, <우연 또는 필연> <오래된 풍경> 등의 전시와 사진집, 연재물을 통해 산업화에 밀려 사라져간 우리 고향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왔다. 그의 사진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위로와 맨 얼굴 같은 진실함이 담겨있어, 사진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조차 많은 아낌을 받고 있다.
고교시절 처음 카메라를 잡고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본인의 증언대로 ‘하여튼 사진가’로 살아온 강운구는, 언론사를 거쳐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며 사진인생 40여 년 간 자신의 마음에 닿는 작업의 결과물들을 꾸준히 쌓아왔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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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구(姜運求)

많은 시간이 흘러 흘러갔다. 그간 남산(南山)은 바뀌었고 나는 늙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삼십 년도 더 넘은 그때의 기억이, 바위에 새겨진 부처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때 단순화하여 집중하기 쉽게 하려고 흑백으로 찍는 것을 포기했었다. 대상마다 조건이 달라서 컬러만 찍는 데에도 네 가지 크기가 다른 필름과 카메라, 여러 렌즈를 사용했었으므로 다른 장비를 추가하여 감당하기는 곤란했다. 그보다는 대상을 동시에 컬러와 흑백으로 인식하는 것이 나에겐 벅찬 일이었다. 흑백 사진은, 찍을 때 대상을 흑백으로 번역해서 보고 인화될 사진의 상태를 미리 떠올리며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컬러 사진도, 여러 필름의 성격에 따라서 결과의 색을 예상하며 찍어야 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유로 단순화하여서, 컬러 사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이미 발표된 『경주남산』이다.1 그 뒤 문득문득 ‘남산’을 떠올릴 때마다 그때 흑백 사진을 안 찍은 게 후회되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을 흑백 사진으로 재현할 기회가 왔다. 나는 디지털을 업고 ‘경주 남산’을 흑백 사진으로 리메이크하였다. 컬러 사진을 흑백 사진으로 변환한 것이 사실상 리메이크인지, 아니면 그냥 흑백판(버전)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흑백 사진으로 바꿔 보기로 결정할 때 비장하기까지 했으므로 ‘리메이크’라고 주장하고 싶다.
컬러 사진의 컬러는 대체로 잔소리가 많다. 그 컬러를 천연색이라고 하지만 천연과는 거리가 먼, 그 필름 브랜드의 고유한 색을 보여 주는 수가 많다. 그런 것을 흑백 사진으로 변환하면 단순한 추상적인 빛깔만 남는다. 그리하여 잔소리들이 사라지면 문득 대상의 본질이 확연히 드러난다. 다만 색이 달라졌을 뿐이지만 느낌의 깊이도 달라진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놀랍다. 물론 난 그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며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사할 손은 없다. 그래서 빌린 손 곁에 앉아서 흑백의 톤이 내 눈에 맞는 표현으로 될 때까지 주문을 해 댔다. 그 결과는 모쪼록 디지털뿐만이 아니라 나의 승리로도 되었기를 바란다.
흑백 사진으로 변환될 때까지 ‘경주 남산’ 사진이 살아 있는 것은 그 찍힌 대상이 중요하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한 것은 그저 요령 피워 얼버무리지 않고 똑바로(정공법) 대상에 접근한 것뿐이다.
‘경주 남산’은 나의 ‘역사 삼부작’2 중에서 가장 먼저인 1983년부터 한 작업이다. 그것에 대한 얘기는 아래에 있다.3

‘경주 남산’이 ‘오래된 풍경’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한 작업이다. 그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말이야 듣기 좋은 프리랜서이지, 사실은 한심한 실업자나 다르지 않았다. 언제 부탁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감을 기다리느니, 오래 전부터 궁리하던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갈 작정을 했다. 한 열흘쯤, 흙먼지 날리는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며 온 나라 산천과 눈 맞추고 착잡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경주에 내려서 남산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몇 군데를 가 보니 스물 몇 해 전에 처음 보았던 때와 상태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저물어 어둑해질 때까지 남산 숲 속을 서성댔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그런 출정의식을 혼자 치르고 난 한 달쯤 뒤부터 몇 년 동안 드문드문 경주를, 남산을 오가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은 바로 경주시내에 닿아 있는 산이다. 주봉은 금오산(金鰲山, 해발 사백칠십일 미터)이고, 동서가 십이 킬로미터, 남북이 팔 킬로미터인 야산이다. 그런데 이 만만해 보이는 산에 가 보면 뜻밖에도 골짜기는 깊고 능선은 가파르다. 그 많은 골짜기와 능선들에는 신라 천 년 동안 있었던 수를 알 수 없는(어떤 학자는 쉰 몇 곳이었을 것으로, 다른 학자는 백 곳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절터와 여러 탑과, 육십 체(體)쯤의 석불이 있다. 거기는, 탑들은 쓰러져 있고 불상들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들이 대부분인 신라 때의 폐허이다. 1987년에 나는 “…신라 천 년 동안 이룩했던 성지(聖地)가 신라가 망한 이후 지금까지 천 년 동안 폐허화되어 왔다. 폐허가 폐허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이곳 말고는 따로 없다”라고 썼었다. 그곳은 지나간 천 년간보다 최근의 몇 년 동안 더 많이 변했다.
물론 돌부처들은 다 종교적 아이콘이고 신앙의 대상이지만, 나에게는 한국조각의 원형인 미술품이다. 그것들은 저 먼 선사시대 암각화의 계보를 잇고 있다. 세련된 솜씨를 가진 뛰어난 명장(名匠)이 새기거나 만든 불상도 있고, 서툰 보통 사람이 그저 정성 하나만 가지고 새기거나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새기거나 만든 시대도, 신라 때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양식화한 부처보다는 보통 사람 얼굴을 새긴 것들도 있다. 여기저기에 있는 ‘승상(僧像)’들도 보통 얼굴들인데, 아마 스스로를 새긴 자화상일 것이다. 이런 조각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서투르나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표가 많이 나는 것들에서 나는 더 조각의 본질을 느꼈다. 요령이나 경험이 없는 ―경험이 많다 하더라도 서양의 대리석과는 달리 한국의 화강암은 강도가 강해서 정교하게 하기가 아주 어렵다― 보통 사람들이 음각으로(또는 음각과 양각을 섞어서) 서투르게 새긴 것들은 지극한 신앙심이었거나, 아니면 표현 욕구였을 것이다. 경험 많은 장인이 했거나 솜씨 없는 보통 사람이 했거나 간에, 천 몇백 년 전 막 새겼을 때보다는 확실히 지금이 더 아름다울 것이다. 천 년 세월의 비와 바람이 화강암의 막 드러나 허옇던 빛깔을 가라앉히고 거칠던 피부를 부드럽게 해서 그렇다.
사진집 『경주남산』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꽤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그 책을 본 사람은 많지가 않다. 고맙게도, 끈질기게도 열화당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1987년부터 지금까지도 책방에 깔아 놓고 있다. 그러나 거의 팔리지 않는다. 내 책이지만, ‘안 팔린다고 좋지 않은 책은 아니다’라고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그 책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말하듯이, 낡지도 않았다. 그 『경주남산』(『능으로 가는 길』과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도)을 이제 좀 추려서 전시라는 다른 형태로, 전시 도록이라는 책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뭔가 새로 일을 시작할 때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마음의 작정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역사가 오래된 유적지를 찍을 때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물론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지만, 작가의 주관이나 기호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에 있는 과거에서, 어떻게 해서든 보다 과거를 떠올리게 표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처한 현재의 상황에 주안점을 둘 것인지를 작정해야만 한다. 처음에 경주 남산을 돌아보며, 나는 현재의 상태를 찍을 수밖에 없지만 과거를 은연중에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생각이 공기와 빛깔에 미치었다. 천 몇백 년 전의 신라 하늘은 지금보다 더 맑았을 것이고, 공기는 지금보다 더 투명했을 것이며, 태양은 더 빛났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의 빛깔은 지금보다 더 짙었겠다. 그래서 옛날의 풍부했을 빛깔에 대해서 상상했다. 그리고 짙은 고대의 빛깔이 현실의 폐허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코다크롬(Kodachrome) 필름이 나타내는 깊이 있는 색감을 떠올렸다. 그 필름은 우리나라 안에서는 구할 수 없었고, 어찌어찌해서 찍었다 하더라도 현상은 외국으로 보내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부처들의 “천 년 세월의 비와 바람이… 부드럽게” 한 화강암 피부를 잘 묘사하려면 큰 카메라에 큰 필름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코다크롬은 큰 필름으로는 생산되지 않았다. 그래서 큰 카메라에는 엑타크롬(Ektachrome) 필름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될 수 있는 한 빛깔이 진하게 나오도록 하려고 했다. 대상과의 거리와 접근성, 그리고 형태와 질감에 따라서 코다크롬을 넣은 35밀리 카메라, 엑타크롬을 넣은 120카메라와 4×5인치 카메라, 그리고 6×9센티미터 홀더를 부착한 4×5인치 카메라를 썼다. (규격의 단위가 제각각인데, 어찌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진 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이렇게 쓴다.)
『경주남산』을 편집할 때는 그 책의 판형에 맞춰서, 큰 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은 가장자리를 조금씩 크로핑(cropping)했다. 이번의 「오래된 풍경」 전시와 책에서는 6×6판 두 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4×5, 6×9, 6×6판을 35밀리 필름처럼 2 대 3 비율이 되도록 크로핑했다. 2 대 3 비율이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보편적 규격의 책에도 알맞게 편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사진들은 거의 다 사진 같지 않다. 그런 추세가 어찌나 강한지, 똑바른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한쪽으로 밀려나 주눅 들어 있다. 유행이란, 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사조(思潮)라는 것은 바뀐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것을 따라 가며 늘 바꾸는 사람은 많고 바뀌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소수에 속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註)

1. 책은 1987년에 열화당에서 발행되어서 지금도 책방에 있으며, 이 사진들은 2011년에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한 나의 개인전인 「오래된 풍경」에 포함되었고, 그 도록인 『오래된 풍경』(열화당, 2011)에도 수록되어 있다.
2. 내가 처음에 기획했을 때의 시리즈 제목이다. 각각 『경주남산』(열화당, 1987), 『사진으로 보는 삼국유사』(까치글방, 1990), 『능으로 가는 길』(창비, 2000)이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의 전람회와 그 도록에서 그것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며, ‘오래된 풍경’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3. 『오래된 풍경』에 내가 쓴 글 중에서 ‘경주 남산’에 관한 대목만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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