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사진전 – 팽목항에서

김봉규

2017.7.25-2017.7.30

~2017.7.25-2017.7.30~

사진, 그날의 팽목항 앞에 오늘의 우리를 세우다

2014년 4월 16일. 팽목항 앞바다는 어둡고 차가웠다. 해군 수송기가 발포한 조명탄에 뒤집힌 배의 형체가 드러났으나, 짧은 순간뿐이었다. 짙은 어둠은 이내 배를 집어 삼켰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만이 남았다. 먹먹하고도, 먹먹했다.

‘모든 사진은 부재의 한 표현’이라고 했지만, 부재하는 어제를 오늘의 현존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 주는 것 또한 사진이다. 김봉규의 사진 <팽목항에서>, 여전히 세월호는 바다 위에 선미를 드러낸 채다.

3년 전 그날, 김봉규는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자동차가 기계적으로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진도 팽목항까지 달렸다. 2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기자로서 한국 현대사의 허다한 현장들을 지켜 온 그다. 그런 기자로서의 예민함과 민첩함이 그를 사건 현장으로 빠르게 이끌었다.

현장에 도착했으나, 승객 304명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비극 앞에 감히 카메라를 들 수 없었다. 기자로서 현장에 갔지만, 그 참담한 바다 앞에서는 김봉규라는 한 개인일 뿐이었다. 수많은 나날을 팽목항에서 서성였다.

다른 사건 현장들 같았으면 기자로서 ‘명확하게’ 사진을 찍는 것이 화두였겠으나, 그는 그날의 팽목항 현장을 ‘충실하게’ 담고자 노력했다. 그의 사진에는 바다에 뛰어드는 잠수부부터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 기도하는 스님들까지 팽목항의 사람들이 있다. 시신과 함께 건져 올린 녹슨 빗부터 희생자 수만큼 많은 노란 리본, 바다 위를 떠도는 국화꽃까지 팽목항의 사물들이 있다. 배를 집어 삼킨 바다와 어둠이 있다. 모두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현실에 대한 빠짐없는 기록이다.

“세월호는 3년이 지나서야 인양되었다. 세월호의 침몰, 아이들의 처참한 죽음,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는 김봉규의 말처럼, 세월호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다. <팽목항에서>는 지독히도 생생하게 그 현실이 현실임을 보여준다. 사진이, 그날의 팽목항 앞에 오늘의 우리를 세우는 것이다.

김봉규 사진전 <팽목항에서>는, 7월 25일부터 30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린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같은 제목의 사진집도 함께 나와,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현실’로서의 역할을 지속해나갈 것이다.

 

작가소개

김봉규 Kim Bonggyu

김봉규는 사진기자로 밥벌이를 해오고 있다. 1990년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사진부를 거쳐 1996년 9월, 한겨레신문 편집국 사진부로 자리를 옮긴 뒤 현재까지 근무(출판국 사진부)하고 있다. 저서로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이 있으며 ‘조선왕릉’ 작업을 최근에 마쳤다. 현재 민간인 학살(Genocide)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노트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자동차가 기계적으로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곧바로 사고현장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근처 쉬미항에서 출항하는 해경 배에 힘겹게 올랐다. 뱃길로 2시간 30분을 달려간 사고현장은 해가 저물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해군 수송기가 발포한 조명탄에 컴컴했던 사고해역 동거차도 앞바다가 순간적으로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왔다. 세월호는 어둠 속에서 실종자 304명과 함께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세월호에 살아 있던 304명 중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도주했고, 국가의 정부조직도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세월호 사고였다.
이 사진들은 갓 쉰을 넘긴, 이 시대의 평범한 아버지로서 비극의 현장을 카메라 뷰파인더로 바라본 고통스럽고 슬픈 감정의 시각적 표현이다. 나는 그저 일개 기자일 뿐이고 힘 없는 50대 아버지다. 그렇다고 슬퍼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사고 뒤 셀 수 없이 진도 팽목항과 사고해역에서 제일 가까운 동거차도 앞바다를 다녀왔다.
지난 27년 동안 수많은 사건과 사고현장을 기록해 왔다. 기자 초년 시절부터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셔터를 눌러 왔다. 그런 것이 마치 훌륭한 기자의 태도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차마 세월호 비극 앞에선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없었다. 컴컴한 바닷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죽어 간 아이들의 부모처럼 나도 그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였기 때문이었다.
내 손에 쥐어진 카메라를 통해 무엇을 전달해야 하고 그런 비참한 모습에서 거대한 참사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나의 능력으로 가능하고 합당한 것인지를 두고 괴로워했다.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
팽목항 오른편 부두엔 사고해역에서 수습된 시신을 옮겨 와 확인하는 신원확인소가 있었다. 바닷속에서 퉁퉁 부어오른 상태로 건져진 자식의 시신을 마주하고 통곡하는 부모의 울음소리를 나는 팽목항을 서성거리며 가슴으로만 담았다. 마음과 몸은 사고의 실체에서 벗어나 외곽으로만 빙빙 돌고만 있었기에 나의 사진들은 사고의 실체를 밝혀 내는 증거 사진으로 매우 빈약하고 부적절하다.
이 사진집에서 나는 나의 사진적 앵글을 강요하는 듯한 사진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독자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고맙겠다. 프레임에 매몰된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문 제작에 필요한 앵글과 나만의 시각을 합치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문지면을 통해서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 앵글과 한 인간으로서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은 서로 같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서로 달랐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사 기자로 마감에 따른 사진을 찾으려고 헤맨 것도 고백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다가선 사진을 찍어 내려는 발버둥은 큰 고통이었다. 오랜 기자 생활에서도 그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이번 사진집은 사고 당일부터 기록된 세월호 관련 사진 중에서 팽목항과 진도를 중심으로만 편집되고 출간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기록들이 세상으로 나와 주길 두 손 모아 기다린다.
부정하고 부패한, 거짓말을 일삼는 정권을 국민은 용서하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토요일 저녁이면 광장에 모여들어 촛불을 켰다. 촛불은 그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다. 스무 번의 촛불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주었다. 모두가 자랑스러운 국민이다. 후세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가 주인이었다고.
세월호는 3년이 지나서야 인양되었다. 세월호의 침몰, 아이들의 처참한 죽음,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밤하늘의 별이 된 아이들이 외로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그리운 엄마 품에 고이 잠들길 바란다.

2017. 3.
동거차도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며
김봉규

4. 사진책

5. 해설

‘그들’에서 ‘우리’로

김훈 (소설가)

사진가 김봉규는 글 쓰는 사람이 부럽다고 나에게 자주 말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쓰고자 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서 조립해서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지만, 사진은 현실의 공간 속에서 눈앞에 벌어진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사진가의 고통이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장르의 경계선 앞에 이르러, 그것을 넘어서지 못해서 답답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언어는 시각이나 청각처럼 관능의 힘으로 대상을 파악하기가 어렵고,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설정하거나 대상이 시간과 공간 속에 처해 있는 표정과 질감을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은 인간의 언어가 의존하고 있는 문법에 따라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이해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그와 나는 서로의 한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던 셈이다.
김봉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에 40번이 넘게 팽목항, 동거차도에 가서 며칠씩 머물면서 현장을 취재했다. 그는 피해자 가족들, 현지 주민들, 구조작업 관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태의 속살에 밀착해 있었다. 그는 가끔씩 나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와서 “좋은 사진을 못 찍었다. 비극의 실체가 잡히지 않고 시간은 자꾸 자꾸만 흘러간다. 슬프고 속상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응답을 보내지 못했고 가끔씩 그가 서울에 왔을 때 소주 몇 잔을 나누어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참사현장에서 그는 십자가를 지듯이 카메라를 짊어지고 풍찬노숙하고 있었다.
2017년 3월 하순에 세월호 선체 인양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팽목, 동거차도, 서거차도, 목포신항을 기웃거렸다. 팽목에서 동거차도로 가는 여객선 안에서 김봉규를 만났다. 그는 배에 탄 섬 주민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김봉규는 동거차도의 한 구멍가게 안방을 차지하고 거기서 후배 기자 한 명과 기식하고 있었다. 그 방에서 나와 마주 앉았을 때 그는 또 사진의 한계를 말하면서 글 쓰는 나를 부러워했다. 그때 나는 찍을 수 없고, 찍혀지지 않는 이미지들을 간직한 그의 내면을 가엾이 여겼고, 그 가엾음으로 나의 한계를 가엾이 여겼다.
내가 섬에서 일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동안 참사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가 나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인간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본다고 해서 보이지 않고, 보여야 볼 수 있다. 본다는 타동사이고 보인다는 자동사인데 이 두 단어는 표리관계에 있고 두 개가 합쳐져야 비로소 사물은 보여진다. 나타남 혹은 보이는 것이 진실의 전체는 아니지만 진실과 관련이 있는 일부이고 그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진실을 보고 그것을 영상으로 붙잡아 놓으려는 자는 나타남을 통해 나타남의 배후, 나타남을 세상으로 밀어내는 실체적 진실에 시선을 보내야 한다. 김봉규는 30년 가까이 현장을 찍어 온 사진기자이지만 그가 이번에 나에게 보여준 사진은 저널리즘적 앵글을 크게 벗어나 있다. 그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시선을 떠나서, 나타남의 안쪽으로 앵글을 돌리고 있다. 그의 앵글은 3인칭의 세계에서 2인칭의 세계로, 2인칭의 세계에서 1인칭의 세계로 이동한다. 그런데, 시선을 교차해 가면서, 카메라 앵글로 이 3국면의 인칭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인칭들의 주변에 1인칭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겹치고 포개지는 흔적들은 인칭들 사이의 주저흔으로 남게 되는데, 대상의 의미는 이 주저흔 속에 깃든다.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써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써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 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
사태의 첫날인 2014년 4월 16일 밤에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찍힌 사진 몇 점은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침몰하는 세월호의 선수를 보여주고 있다(9, 11, 13쪽 사진). 세월호의 선수가 물위에 솟아 있다. 어둠은 하늘과 바다, 먼 섬들의 능선이고, 빛은 작업용 소형 선박 두어 척이 물위에 떨어뜨린 불빛과 하늘을 가르는 조명탄의 연기이다. 이 숨 막히는 비극의 현장은 적막하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밤하늘에는 달, 별, 구름이 없어서 하늘과 바다는 단지 어둠의 농도만으로 구별되는데 그 사이를 희미한 수평선 한 줄기가 직선으로 건너가고, 조명탄 연기가 수평선에 닿아 있다. 이것이 그 비극의 첫날밤에 김봉규의 마음에 새겨진 바다이다.
그 바다에 새벽이 왔을 때는 (팽목항) 탐조등의 불빛과 멀리 동거차도 쪽 하늘에서 쏟아지는 조명탄의 불빛이 바닷물 위로 빛의 다리를 뻗치고 있을 뿐, 바다는 인기척이 없고 멀리 어촌 마을의 불빛 몇 개가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면서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15쪽 사진).
이 사진들은 적막을 포착함으로써 아우성을 드러낸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세월호 선수 아래쪽, 아주 가까운 곳에 있고, 인간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조명탄 불빛이 쏟아지는 바다는 인기척이 없어서, 거기서 사실상 아무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진은 말하고 있다. 절망, 분노, 슬픔은 적막 속에 억눌려 있다.
다이빙 벨이 내려가는 장면을 찍은 사진들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억제되고 단순한 구조 속에 사진가의 마음은 물밑에 가라앉은 것들로 향하고 있다(27쪽 사진). 다이빙 벨이나 크레인이 작동하는 장면의 사진에서 사진가가 드러내려는 것들은 극도로 억눌려 있다. 사진은 몇 개의 선으로 구획되면서 조용한 구도를 보여준다. 바다와 하늘은 고요한데 수평선과 로프가 직각으로 교차하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을 어두운 물밑으로 끌어당긴다(23쪽 사진).
김봉규의 사진 속의 인물들은 대개가 희생자 유가족들이나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들이다. 인물들의 분노와 슬픔은 낮게 깔려 있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침묵 속에서 보여준다. 인물들은 대체로 얼굴 표정을 정면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7, 39쪽 사진). 인물들의 윤곽선은 안개나 바람, 빗방울이나 흐린 광선에 의해서 풀어져 있다. 바다는 저물고, 먼 섬의 등불이 물위에 떠 있는데, 담요를 걸친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돌아서 있거나 쭈그리고 앉아 있다(55쪽 사진). 슬퍼하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눈물이 말라 버린 사람들의 돌아선 어깨에 바다의 어둠이 스며들고 있다. 돌아선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선 어깨는 어둠 속으로 풀어져 있다. 사진 속의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닌 어떤 새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이 사람은 우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가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슬픔과 고통의 풍경의 일부로, 풍경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슬픔의 풍경은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생명 안에 자리 잡은 슬픔이다. 사진 속의 이 돌아선 사람들은 인칭의 구획을 넘어서서, ‘우리’ 또는 ‘인간들’이라는 확장되고 연대된 존재로 다가온다.
김봉규는 3인칭 대상을 1인칭의 시각으로 포착함으로써 그 대상을 수많은 1인칭 속으로 확장시킨다. 그래서 그는 그가 고민하고 있던 대상의 경계선을 뭉개 버릴 수 있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던 날, 인양된 세월호는 목포신항에 도착했고, 나는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 다음날 나는 안산분향소를 찾았다. 단원고 졸업생 한 명이 지난번 지방선거 때 19세가 되어서 투표권을 얻었다. 그 학생이 생애 최초로 투표를 하고 돌아와서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그 선생님은 단원고등학교에서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를 가르치던 역사 선생님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이번에 처음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내 한 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 선생님은 세월호 참사 때 배 안에서 학생들을 살피다가 순직했다. 편지는 지금 분향소 제단 위 선생님의 영정 앞에 놓여 있다. 세월호의 고통을 감당해 나가면서 한국인들은 슬픔과 분노의 힘으로 인칭을 뛰어넘는 넓은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김봉규의 사진은 그 넓은 세계로 가려는 수많은 노력들 중의 하나이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단원고 학생들은 2017년 5월 9일 대통령선거에서 첫 투표를 했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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