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사진전 – 빌린 박씨

이재갑

9.11-9.30

~이재갑 9.11-9.30~

대한민국에, ‘혼혈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달라

이것은 ‘뿌리(本)를 빌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의 주민등록상 이름은 박근식. 그러나 ‘피터’라고 더 자주 불렸다. 피터는 1970년 초여름, 서울행 완행열차에서 ‘발견’되었다. 수십 알의 수면제를 삼키고 쓰러진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가 들어있었다. 혼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절규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이 혼혈 청년의 자살기도는,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혼혈인’의 존재를 생각게 했다. 전국 신문지면에 박근식이라는 이름이 올랐고, 그동안 한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 응달처럼 드리워져 있던 혼혈인 문제도 함께 떠올랐다. 혼혈인 처우개선을 위한 재단과 교육시설이 만들어지고, 일정 교육기간이 지나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등이 마련되기까지, 그 시작점에 ‘박근식’이라는 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습대로라면 성씨(姓氏)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야 했지만, 근식은 어머니의 성인 밀양 박씨를 성으로 삼았다. 6.25전쟁 직후에 태어난 그에게, 아버지는 ‘미군’이라는 풍문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자신은 “밀양 박씨가 아니라 빌린 박씨.”라고 말하곤 했다.

사진가 이재갑은, 어머니의 성씨를 ‘빌려왔다’고 말하며 웃던 박근식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평생을 한국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살아온 박근식이 ‘빌림’의 의미를 모를 리 없으니, ‘빌린 박씨’라는 말만으로도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아야 했던 그이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빌린 박씨’를 중심으로 혼혈인에 관한 기록 작업을 이어 온 이재갑은 ‘불편한 역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치열한 리얼리즘의 사진가’로 불린다. 조선인 강제징용, 경산 코발트광산의 민간인 학살 등 한국 근현대사의 아프고 불편한 기억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그런 그가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작업이, <혼혈인 – 내 안의 또 다른 초상(1997)> <또 하나의 한국인(2005)> 등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혼혈인 세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이다. 혼혈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아픔이요,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소명감이 1992년부터 30여 년을 이 작업에 천착케 했다.

여기서의 ‘혼혈인’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미군 주둔의 시대상황 속에서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외모와 피부색이 다르게 태어난 아이들을 말한다. 우리 사회는 눈에 띄는 외모의 그들을 차별의 손쉬운 표적으로 삼았다. 근거 없는 순혈주의였다. 심지어 전쟁과 미군주둔이라는 역사적 배경이나 개별적인 진실은 보려하지 않고, 혼혈인과 그의 어머니들 모두를 ‘기지촌 여성과 자녀’로 매도하며 분리했다.

처음엔 수만 명에 달했던 혼혈인들은 냉대와 무관심 속에 대부분 한국을 떠나갔다. 전쟁고아들과 함께 수많은 혼혈아동들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고, 어릴 때 입양되지 못하고 한국에서 성장한 혼혈인들도 1982년, 미국에서 특별이민법이 통과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떠나지 못한 천 여 명의 혼혈인들조차, 이제 노환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기차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혼혈인 청년도 2009년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목숨을 살라서라도 알리고자 했던 70년 초여름 그날의 일은 어느 하루의 결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미군의 강압적인 폭력에 의해 태어났듯이, 수많은 혼혈인의 어머니들도 전쟁과 시대의 희생자였음을 알리고자 했다. 정식인가조차 내주려 하지 않는 <한국혼혈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평생을 혼혈인을 왜곡하고 문제를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국가를 상대로, 혼혈인들을 부끄러운 ‘전쟁의 부산물’로 여기는 사회를 상대로 끊임없이 생을 살랐다. 자립 농장을 만들어, 사회로부터 배척 당해온 혼혈인들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기도 했다. 스무 살 자살 이후의 생 40년이, 다시금 수없이 잘게 나누어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항거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재갑 사진전 <빌린 박씨>는 이제는 고인이 된 혼혈인 1세대 박근식 씨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빌린 박씨’들을 소환하는 전시다. ‘오도된 채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그들을 마주함으로써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성찰을, 사진의 힘을 빌려 해보려는 것이다.

박근식의 장례식 영정 앞에서, 사진가 이재갑은 약속했다. 당신은 이 땅을 떠났어도 남겨진 사진을 통해 당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겠다고. 그날의 약속이, 이제야 지켜진다.

98년 2월 경기도 양평_방송국 촬영을 위해 찾아갔다. 만난 지 6년째 되던 무렵이다. 그때 피디가 “이재갑 씨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박근식 씨는 이렇게 답을 했다. “좋아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지는 았는다”라고

후배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다. 혼혈인들이 나이가 많아 활동이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혼혈인전문 요양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09년 1월 경기도 양평_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작가소개

이재갑

이재갑은 ‘불편한 역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치열한 리얼리즘의 사진가’로 불린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혼혈인 세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왔으며 조선인 강제징용, 경산 코발트광산의 민간인 학살 등 한국 근현대사의 아프고 불편한 역사의 기억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고 현재는 영남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니콘이 공식 후원하는 리더스클럽 멤버로 활동 중이며 NGPA(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아카데미)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민주공원 기획전시실, 2016), <상처 위로 핀 풀꽃>(스페이스99, 2012), <일본 속 한국 풍경>(헤이리 공 갤러리, 2010)등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눈빛, 2016), 『일본을 걷다』(살림, 2011), 『잃어버린 기억』(이른아침, 2008) 등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작업노트

1992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혼혈인 작업은 올해로 26년이 지났다. 물론 혼혈(이하 형님)인 사진작업만 한 것은 아니지만 형님들과 약속한 3가지 중 두 가지는 지켰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약속만 남아있다. 요약하면 첫 번째는 평생 형님들과의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이고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형님들의 역사를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이다. 완성되거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2005년 10월 눈빛 출판사에서 “또 하나의 한국인”이라는 중간보고서 성격의 사진집이 출간 되었다. 당시 사회적 이슈(하인즈 워드)와 맞물리면서 가수와 연예인으로서의 혼혈인이 아니라 실제 한국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흐른 2009년 9월 ‘한국혼혈인협회’의 정신적 지주였고 기둥이었던 박근식 회장이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당일 화장을 하고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이 모서져있는 충북 괴산의 작은 암자로 모셔진다고 했다. 큰 대형버스에 3일 밤낮을 같이 있었던 형님들을 비롯한 저는 당연히 함께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돌아가신 형님을 직접 만날 뵐 수는 없었다. 벌써 9년이란 시간이 흘렸지만 여전히 찾아갈 수가 없다.

1970년 초여름, 대한민국에 ‘혼혈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혼혈 청년 박 근식(피터)은 부산으로 무작정 내려갔다. 그곳에서 서울 행 완행열차를 타고 양복안주머니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필 진정서를 넣어두고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였다.

 

순식간에 전국 신문지면을 통해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혼혈인 처우개선을 위한 재단과 교육시설이 만들어지고 일정교육기간이 지나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당시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지금의 부천시 소사구 소재 유한양행 부지에 펄벅 재단을 설립,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남다른 손재주를 가졌던 박 근식은 용접에서부터 전기전자 등 손으로 직접 만들고 제작할 수 있는 일들을 했고 의기투합한 동료들과 작은 농장을 지어 삶을 이어나갔다.

한참 전국을 다니며 혼혈(형님)인이 있는 곳이라면 제주에서 강원산골 어디든 찾아다녔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근식 한국혼혈인 협회회장이 어느날 나에게 “어디 이씨”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저는 “경주 이가”고 익제공파 38대손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빌린 박씨”라고 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당시에는 웃으면서 그랬다. 어머니의 성(밀양박씨)을 따라 박씨 성을 따랐지만 자신은 밀양 박씨가 아니고 “빌린 박씨”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었는데 당시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을 알면서도 삶에 있어서는 늘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러나 3일 낮밤을 같이 있으면서 그동안 만났던 순간순간이 기억났다. 한국 혼혈인들의 산 역사이자 고통을 넘어 대한민국 이 땅에 혼혈인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음으로 양으로 자신들의 외침을 들려주는 그 어떤 곳이든 찾아갔었던 형님이었다.

그러나 형님이 돌아가시고 많은 것에 있어 변화가 있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 달에 두세 번 이상 찾아가던 만남도 뜸해졌고 매달 모이던 만남역시 그렇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이어온 형님들과의 인연은 물론이고 자주하던 전화도 뜸해진 어느 날인가 갑자기 형님생각에 서러움이 복받쳐 서글픈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불현 듯 형님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마무리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으로서의 슬럼프가 아니라 다른 작업으로 인해 자주 찾아뵐 수 없다는 미안함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서로 엇갈리면서 형님의 “빌린 박씨” 이야기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의 혼혈인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문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된 형님들의 삶이 26년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출생과 깊은 연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님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어머니와 자녀에 대한 이야기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성장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1세대인 형님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생각으로 가까이 가거나 사진으로 촬영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실제 촬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결혼식장 혹은 전체 모임에서가 전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혼혈인 2,3세는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 평생 혼혈인의 권익신장과 권리를 위해 평생을 살다가간 형님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장례식장에서 뿌연 먼지와 함께 사라진 유족들과 형님의 혼백이 담긴 유골함을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형님들하고 약속한 두 가지는 지켰다. 하지만 나머지 한 가지는 내가 스스로 약속을 했다. 형님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얘기한 ‘빌린 박씨‘ 이야기를 제목으로 혼혈인 2,3세대의 삶을 사진과 책과 전시로 마무리하고 판매된 수입금으로 작은 추모비를 만들어 형님 영정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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